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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sentful look (Polymer clay letter)_variable installation_2016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류병학 미술평론가

 

“가짜 신에 대한 이야기다.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신이 되어버린 존재(Eel)와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갖추어 신으로 만들어진 존재(Mermaid Bobbie Doll)가 현실에 드러나는 시대를 살아간다. 절대적인 신의 선함이 아닌 인간에 의한 꾸려져 가는 세상 속에서 신은 부정되거나, 의심되거나, 원망 되며,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리고 인간은 절대적인 신을 외면하고 떠나간다. 일생에 부정할 수 없는 신의 존재를 알아버린 이의 이야기는 다시 무기력해지고,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증거는 그저 사라져버린 상상이 되어버린다. 마음속에 생명의 살리고자 하는 사랑이 없으므로.”

 

- 다니엘 경의 ‘작업 노트’ 중에서

 

몇 년 전 온라인에서 ‘화장실 명언’ 시리즈가 네티즌의 눈길을 끌었던 적이 있다. 여러분도 기억하실 ‘화장실 명언 1위 3탄’은 니체(Friedrich Nietzsche)와 신(GOD) 그리고 청소아줌마의 낙서였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적고, 신은 그에 대해 “니체 너 죽었다” 고 답변하고, 청소아줌마는 “니네 둘 다 죽었다” 고 화장실 벽에 낙서해 놓았다. 그렇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신은 죽었다” 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문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구는 여전히 논쟁적인 문구로 남아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소아줌마의 촌철살인적인 낙서가 네티즌들에게 주목을 끌었는지 모르겠다.

 

목사 집안에서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자란 니체는 <즐거운 지식(Die frohliche Wissenschaft)>(1882)에서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Gott ist tot. Gott bleibt tot. Und wir haben ihn getotet.)”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도 신의 죽음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신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을 살해한 그들은 그들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니체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신은 누구인가? 혹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유럽 문명의 종말과 동시에 새로운 문명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기서 ‘신’은 단순히 ‘종교’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나 ‘예술’ 그리고 ‘가치’로도 확장하여 읽을 수 있겠다. 청소아줌마의 낙서 밑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예술은 죽었다!

 

판타지 바이블 어드벤처 전시회

 

만약 오늘날 누군가 ‘신’에 대해 작업을 한다고 하면, 그/녀는 시대착오적인 아티스트로 간주될 것이다. 그런 까닭일까? 다니엘 경은 ‘신’이 아니라 ‘가짜’ 신에 대한 에피소드(Episode)를 작업한다. 2016년 2월 2일 복합문화공간17717에서 오픈하는 다니엘 경의 ‘신(GOD)’은 그녀의 10부작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중 여덟 번째 에피소드이다. 1부 프롤로그(Prologue)는 ‘The Heaven’(학고재, 2006), 2부 ‘New Baby Born’(문신미술관, 2007), 3부 ‘Promise’(벨벳갤러리, 2008), 4부 ‘Giving Up, and Holding’(스페이스 홀앤코너/오사카 하얏트호텔, 2009), 5부 ‘Lovely Being’(갤러리 아뜨랑, 2010), 6부 ‘A Mission I-II’(산토리니, 2011/중아트갤러리, 2012), 7부 ‘DEATH’(갤러리 도스/8번가 갤러리, 2014), 8부 ‘DEEP DESIRE’(스피돔갤러리, 2015) 그리고 이번 9부 ‘GOD’이다.

 

따라서 다니엘 경의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는 10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방대한 ‘판타지 바이블 어드벤처 전시회’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프롤로그와 여덟 개의 에피소드 그리고 에필로그(Epilogue)로 이루어져 있다. 프롤로그는 천국에 대한 것(The Heaven)이다. 그리고 여덟 개의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천국에 대한 에피소드(The Heaven), 탄생에 대한 에피소드(New Baby Born), 다른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상상과 그리움에 관한 에피소드(Promise),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 머물기 힘든 곳을 벗어나길 바라는 에피소드(Giving Up, and Holding), 사랑받는 자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하는 에피소드(Lovely Being), 진정 사랑받는 자의 모습과 죽어도 아깝지 않는 가치를 발견하는 에피소드(A Mission / Mission 2), 마음, 생각, 영혼에 대한 죽음의 에피소드(DEATH), 갈망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에피소드(DEEP DESIRE), 가짜 신에 대한 에피소드(GOD).

 

다니엘 경의 에피소드 배경은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해체시킨 마법과 환상이 가득한 공간으로 연출된다. 그리고 그 환상적 공간에 온갖 희한한 하이브리드(hybrid)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하이힐(High Heel)과 백색 문어(Octopus)가 접목된 캐릭터, 왕관 쓴 가오리, 인형 얼굴을 가진 불가사리(Star Fish), 가시가 난 해마(hourse fish), 연두색 문어와 접목된 자동차 캐릭터, 지느러미가 없는 녹색 펭귄, 노랑 고래, 하이힐과 핑크 문어가 접목된 캐릭터, 바비인형과 장난감을 머리카락으로 접목시킨 인어, 보석 박힌 하얀 구두와 문어를 접목시킨 샹드리에(Chandelier), 천국의 문(Gate of heaven)과 지옥의 문(Gate of hell), 공룡과 로봇을 접목한 캐릭터, 무지개 물고기(Rainbow Fish)들로 이루어진 크리스마스트리, 장난감 왕관을 쓴 장어(곰치)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이 지면에서 다니엘 경의 10부작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중 여덟 번째 에피소드인 ‘신’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자, 그럼 다니엘 경의 ‘신’이 전시될 복합문화공간 17717을 방문해 보도록 하자. 17717? 그것은 복합문화공간의 번지수(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177-17번지)를 뜻한다. 복합문화공간 17717은 건물의 지하1층에 위치한다. 당신이 지하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마치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에 나오는 마법의 옷장 같은 문이 나타난다. 당신이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비로운 다니엘 경의 판타지 랜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도대체 요즘 교회에서는 뭘 가르치는 거야!"

 

당신이 복합문화공간 17717의 마법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무엇보다 길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길은 털로 만들어져 있다. 털길? 그렇다! 그것은 윤기 나는 털로 만들어진 길이다. 당 필자, 그 털이 눈으로 보아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손으로 만져본다. 필자가 손으로 만져본 그 털은 부드럽고 따스한 털이다. 하지만 그 털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인조모피(人造毛皮)털, 즉 가짜 털이란다. 그러고 보니 필자가 손으로 털을 만졌을 때 정전기(靜電氣)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건 패션(Vegan Fashion)’을 지지하는 필자는 안심하고 그 가짜 털(길)을 따라 걷는다.

 

필자는 부드럽고 따스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가짜 털(길)을 밟고 첫 번째 당도한 곳에서 묘한 오브제를 만난다. 그것은 언 듯 보기에 세 마리의 인어들을 접목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한 마리의 형광 퍼플 컬러의 인어와 두 마리의 형광 그린 컬러의 인어 머리가 마치 조선시대 가체(加髢)처럼 몸보다 더 거대하게 보인다. 오잉? 그런데 그 인어들은 바비인형들이 아닌가. 다니엘 경은 일명 ‘현대판 비너스’인 바비인형을 인어로 변신(變身)시킨 것이다. 작가는 바비인형의 얼굴과 팔만 제외한 몸에 폴리머클레이(polymer clay)로 늘씬한 하반신을 만들고 마치 물거품처럼 일어난 머리를 제작해 놓았다. 흥미롭게도 작가가 제작한 하반신과 머리는 손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마치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바비인형처럼 미끈하게 보인다.

 

폴리머클레이? 그렇다! 그것은 아이들이 공작시간에 주로 사용하는 수지점토다. 그것은 무독성일 뿐만 아니라 손에 색이나 점토가루가 묻지 않아 작업하기가 편리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인기이다. 더욱이 그것은 가볍고 부드러우며 말랑말랑하여 아이들의 작은 손으로 원하는 모양을 쉽게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손(가락)을 많이 이용한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두뇌발달에도 이롭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폴리머클레이로 다양한 형태를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어서 창작표현에 유익한 재료라고도 할 수 있겠다. 덧붙여 손으로 조물조물 만드는 폴리머클레이는 집중력을 높여주고, 인내심도 키워주기 때문에 아이들의 인성교육에도 유용하다고 한다. 머시라? 필자가 폴리머클레이 홍보맨이냐고...요?

 

다니엘 경이 사용하는 폴리머클레이는 오븐에 굽는 스컬피 폴리머클레이가 아닌 공기 중에 굳는 피모 폴리머클레이이다. 그녀는 피모 폴리머클레이 중에서도 소프트하고 원색적이며 형광색인 클레이를 사용한다. 더욱이 그녀가 사용하는 폴리머클레이는 별도의 캐스팅 과정이 없기 때문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폴리머클레이는 오브제와 결합시키기 용이하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폴리머클레이를 다양한 오브제에 접목시켜 기발한 캐릭터를 만든다. 다니엘 경이 폴리머클레이를 10부작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의 1부 프롤로그에서부터 사용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녀가 일종의 ‘클레이홀릭(clay-holic)’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그녀는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야광 클레이의 발광(發光)에 발광(發狂)한다.

 

다니엘 경은 폴리머클레이로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3개의 바바인형을 접목시킨 일종의 ‘바비-인어’를 <아이돌(Idol)>로 명명한다. 그렇다! 바비인형은 아이들에게 일종의 (신으로 숭배되는) ‘우상’이다. 다니엘 경은 3개의 바비인형들의 머리에 폴리머클레이로 거대한 머리카락들을 만들어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 그것은 마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삼위일체?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삼위일체(Trinity)는 성부(聖父)인 하느님과 성자(聖子)인 예수와 그리고 성령(聖靈)을 동일한 신격으로 여기는 기독교의 교의(敎義)이다. 이를테면 하느님인 유일신은 아들인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에 내려와 성령의 형태로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신이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물론 다니엘 경이 사용한 3개의 바비인형들은 ‘따로 또 같이’라는 삼위일체와는 달리 똑같이 복제된 인형들이다. 그렇다면 다니엘 경은 현대판 ‘아이돌’을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자본주의가 만든 ‘시장의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까닭에 그녀는 우리가 걸을 길을 부드럽고 따스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으로 착각케 하는 가짜 털로 길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오잉? 세 개의 ‘바비-인어’의 거대한 머리카락들 사이에 장난감이 보인다. 그것은 변신자동차 ‘또봇’이다. 다니엘 경이 바비와 인어를 접목시키듯, 또봇은 로봇과 자동차를 결합시킨 것이다. 그런 바비-인어의 머리카락들은 또봇의 변신을 저지시키고 있다. 와이? 왜 그녀는 또봇의 변신을 저지하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전혀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걷던 필자 앞에 이번에는 거대한 성전(Church)에 부유하는 괴상한 오브제가 출현한다. 거대한 성전과 괴상한 오브제?

 

여기서 말하는 ‘거대한 성전’은 송광찬 사진작가가 촬영한 퀠른성당(Kolner Dom)의 내부 사진이라고 한다. 그리고 ‘괴상한 오브제’는 다니엘 경이 형광 그린컬러 폴리머클레이로 장어(곰치)를 변형시켜 제작한 캐릭터이다. 흥미롭게도 그 미끈하고 길쭉한 형태의 캐릭터는 왕관과 목걸이를 하고 있다. 그 목걸이와 왕관은 특히 여자아이들이 공주 놀이할 때 치장용으로 자주 사용하는 플라스틱 목걸이와 왕관이다. 다니엘 경은 이 작품을 <장어신(The GOD of EEL)>으로 명명한다. 따라서 다니엘 경의 <장어신>은 송광찬 작가와의 공동작업(Collaboration)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당 안에 가짜 왕관을 쓴 기괴한 캐릭터들이 마치 바다에서 헤엄치듯 날고 있다. 성당 안을 발광(發狂)하듯 부유하는 그 기괴한 캐릭터들은 형광색으로 제작되어 성당 안에서 발광(發光)한다. 다니엘 경이 기괴한 캐릭터의 모델로 삼은 곰치(common moray eel)는 야행성으로 산호나 암초의 갈라진 틈 또는 구멍에 숨어서 작고 매서운 눈과 예민한 후각으로 먹이를 찾는다. 곰치는 성질이 사납고 날카로운 이빨과 독샘을 가지고 있어 곰치에게 물리면 신경계와 순환계가 마비된다 한다. 그렇다면 가짜 왕관을 쓴 그 기괴한 캐릭터는 성당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다니엘 경은 기괴한 캐릭터의 모델로 삼은 ‘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리 지어 살아가는 곰치는 포악스런 성격의 바다생물입니다. 곰치는 비늘이 없는 물고기류로 성경에서는 부정한 바다생물로 먹기를 금기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괴한 캐릭터는 신성한 성당 안에서 자신에 대한 부당함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란 말일까?

 

방황하고 아파하는 젊은 아티스트의 아포리즘

 

복합문화공간17717은 두 개의 전시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필자가 가짜 털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만난 작품들은 정방형의 전시공간인 반면, 나머지 공간은 삼각형의 전시공간이다. 필자는 삼각형의 전시공간으로 들어선다. 헉! 그 공간에는 벽면 가득 영문텍스트로 가득한 한 것이 아닌가. 한 마디로 그곳은 ‘글자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그 영문텍스트들은 모두 다니엘 경이 폴리머클레이로 일일이 만든 것이다. 당 필자, 일단 전시장 벽면에 ‘쓰여진’ 영문텍스트들의 일부만 이곳에 인용해 보겠다.

 

“I argue that the gods' treatment on us is extremely unfair.(나는 우리에 대한 신들의 처사가 지극히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No matter what kind of gods there are, your existence itself is a disaster and an unfair agony.(어떤 신이든 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재앙이며 부당한 고통입니다.)”

“To the eternal call, call and call of the gods, a son turns his back to his moms and a bride lost her bridegroom.(신들의 영원한 부름, 부름, 부름에 아들은 어미에게 등을 돌리고 신부는 신랑을 빼앗깁니다.)”

“You and we cannot co-exist in the same world. We cannot flourish under the shade of your trees.(당신들과 우리는 같은 세상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의 나무 그늘에서는 우리가 번성할 수가 없어요.)”

“We want to belong to ourselves.(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전시장 벽면에 폴리머클레이로 만들은/쓰여진 텍스트들은 마치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디고리 교수가 한 말, “도대체 요즘 학교에서는 뭘 가르치는 거야”라는 말을 “도대체 요즘 교회에서는 뭘 가르치는 거야”라고 변형한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다니엘 경은 우리에게 교회에서 배운 성경을 잊어버리라고 하는 것인가? 그런 까닭일까? 다니엘 경은 자세하게 묘사된 성경의 내용을 포기한다. 그렇다! 그녀가 전시장 벽면에 폴리머클레이로 만들은/쓰여진 영문텍스트들은 어디선가 읽은 텍스트들이다. 그렇다! 그 영문텍스트들은 루이스의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Till we have faces)>(1956)에서 인용한 인용문들이다. 루이스의 소설은 고대 로마 시인 아풀레이우스(Lucius Apuleius)가 지은 <변신(Metamorphoses)>에 나오는 ‘큐피드와 프시케’ 신화를 토대로 다시 쓴 일종의 ‘현대판 신화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큐피드와 프시케’ 신화는 제목 그대로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루이스는 프시케의 큰 언니 오루알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루이스의 소설에서 오루알은 추녀로 베일을 쓰고 다닌다. 오루알은 막내 동생인 프시케를 사랑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프시케는 바로 그 아름다움 때문에 비너스의 저주를 받아 제물로 받쳐지게 된다. 비너스는 그녀의 아들 큐피드에게 프시케가 세상에서 가장 추한 생물과 사랑에 빠지도록 명령하지만, 큐피드는 아름다운 프시케의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큐피드는 프시케에게 자신의 모습을 절대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한편 오루알은 죽은 동생(프시케)의 장례를 치르고자 그녀의 시체가 있는 곳을 찾지만 죽은 동생이 아닌 살아있는 동생을 만나게 된다. 언니는 동생에게 자초지정을 듣지만 동생의 남편이 괴물이라고 판단되어 동생에게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라고 당부한다. 결국 프시케는 남편의 경고를 어기고 어두움 속에서 자는 남편(큐피드)의 얼굴을 확인했다가 버림받아 저주 속에서 떠돌게 된다. 여기까지는 ‘큐피드와 프시케’ 신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루이스는 언니들의 질투가 프시케를 파멸로 몰아넣었다는 아풀레이우스의 ‘큐피드와 프시케’이야기를 각색한다. 오루알은 아풀레이우스의 이야기가 오해라고 생각해 신들에게 고소장을 쓴다. 그 ‘고소장’이 다름 아닌 루이스의 소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이다. 오루알은 자신은 프시케를 질투가 아니라 진정 사랑한 것이라고, 진실을 왜곡하지 말고 바로잡아 달라고 신들에게 항변한다. 그러나 오루알은 신들에게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는 가운데 스스로 깨닫는다. 자신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를테면 루이스는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닌지 성찰하게 해준다고 말이다. 루이스는 독자에게 속삭인다. 혹 당신이 오루알은 아닌지. 오루알은 말한다. “How can we face the gods when we have not found our face yet?(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다니엘 경의 세 개의 ‘바비-인어’는 다름아닌 오루알과 레디발 그리고 이스트라(프시케)가 아닌가. 그러면 형광 퍼플 컬러 ‘바비-인어’가 프시케가 아닐까? 그런데 세 개의 ‘바비-인어’의 얼굴은 루이스의 소설 속의 세 딸과는 달리 모두 똑같다. 그러면 다니엘 경은 루이스 소설의 세 딸을 ‘변신’시킨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녀들이 머리카락으로 받들고 있는 ‘또봇’으로 암시된다. ‘또봇’은 ‘변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아풀레이우스의 ‘큐피드와 프시케’ 신화가 들어있는 책의 제목도 다름아닌 <변신>이다. 그리고 다니엘 경이 제작한 모든 캐릭터들 역시 대부분 심해에 사는 다양한 바다생물체를 변신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 경은 ‘변신’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까? 혹 그녀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얼굴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잃어버린 얼굴? 그렇다면 우리의 얼굴은 우리의 진정한 얼굴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의 얼굴은 변신한 얼굴이란 말인가?

 

다니엘 경의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는 방황하고 아파하는 젊은 아티스트의 아포리즘(Aphorism)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1부 프롤로그에서부터 9부 ‘신’의 에피소드까지 보면, 다니엘 경은 신비로운 캐릭터들을 통해 작가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에피소드들에 남겨둔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의 작품들 사이의 ‘간극’에 ‘다리’들을 놓으면서 꿈과 환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된다.

 

다니엘 경의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1부에서 9부는 다니엘 경의 꿈과 환상을 통한 세상의 현재와 미래의 종말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다니엘 경이 마치 <다니엘서(The Book of Daniel>의 다니엘처럼 혼란스러운 역경을 헤치고 나가는 것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다니엘 경의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를 ‘예술의 계시록’이란 부제를 달고 싶을 지경이다. 만약 우리가 논리와 상식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다니엘 경의 ‘작품’을 본다면, 우리는 다니엘 경의 ‘잠화(箴畵)’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만약 우리가 우리 얼굴에 씌워진 베일을 벗고 다니엘 경의 환상적인 세계로 들어온다면, 우리는 다니엘 경의 마지막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다니엘 경의 마지막 10부인 에필로그도 꿈과 환상으로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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